
1. 줄거리
영화 "봄날은 간다"는 흐드러진 벚꽃 아래에서 진짜 이별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에 다 만난 두 남녀는 봄날에 만개한 꽃처럼 잠시 함께 사랑했으나 여름이 오자 가 뭇 없이 저버리는 꽃처럼 멀어져 갑니다. 사람이 딱 따면 정도의 기를 바라는 외로운 여자와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순수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다룬 "봄날은 간다"는 봄날만큼 아름답고, 봄날 만큼 짧은 자연스러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먼저 유혹하고 먼저 밀어내는 너무도 이쁜 여자 은수의 변덕이 밉게 보이는 것은 우직하고 순진한 청년 상우 시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상우와 은수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남자 상우는 그를 금쪽같이 여기는 가족도 있고, 그야말로 한마디면 달려와 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부처가 내는 소리를 잡아내는 음향 엔지니어인 상우는, 다른 누군가의 작업 속에서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반면 지방 방송국 PD이자 아나운서인 은수는 좁은 부스 안에서 혼자 소리를 외부로 내보내는 일을 합니다. 무엇보다 함께 해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은수는 결혼에 한번 실패한 이혼녀입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기에 결혼까지 갔었던 은수는 사랑의 기승전결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상우는 아직 제대로 된 사랑과 이별의 경험이 없는 연애 초보이자, 사랑마저 할머니에게 배운 남자입니다. 한때 할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을 받았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외도로 속까지 볶고 말았지만, 치매가 생기면서 우리 전 좋았던 때 기억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평생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할머니에게 사랑의 모든 것을 배운 상우는 사랑이란 그렇게 변하지 않는 순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반면 사랑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물, 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은수는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방향, 무게가 상응하는 다릅니다. 이 둘은 사랑의 감정으로 뜨거울 때는 함께 할 수 있어도 감정이 내리막을 아직 여권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왜 좋은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을 갑자기 그가 부담스러워지고 실증이 나은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녀가 애써서 그런 것 것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이, 그리고 결혼이 사랑의 무덤임을 한 그녀는 쉽게 빠지고 다시 쉽게 빠져나오는 사랑 말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사랑에 서툰 상황은 그녀가 일 때문에 전화를 한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악수하자며 손을 내미는 것이 전부입니다.
반면 온수는 라면 먹고 끌 내어 에 이어서 자고 갈래요라고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여자입니다.
그렇게 젊은 남자를 뜨겁게 유혹해 놓고 커서 누리 좀 더 친해지면 해요 라는 밀당의 묘 앞에 순진한 청년 상우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끝이 어디까지.이고 어떤지를 명확하게 않은 은수는 자연스레 사랑의 권력자로 불립니다.
영화 속 은수는 대부분의 식사를 라면으로 뗍니다. 인스턴트 음식의 대표 주자, 라면 말이죠. 밥이 나오는 장면은 딱 2컷입니다.
둘이 처음에, 그러니까 일을 하고 나무 식을 할머니가 차려준 꾹꾹 눌러 싼 고봉밥과 연애가 정점을 지날 때, 뜬 아쉬움이 들어오는 은수를 향해 상우가 기꺼이 차려준 밥상이 그것입니다. 좋아지기 전까지는 밥을 먹을 수 있어도 진짜 좋아진 후에는 국과 꿈에 김치가 올라가 있는 밥상이 부담스러운 것이 은수입니다. 딱 거기까지의 사랑만이 가능한 이가 은수라면, 사랑에 모든 것을 건 남자가 상우입니다.
연애 초반 데이트 길에서 함께 묻혀 있는 부부의 묘를 바라보며 은수는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함께 묻힐까?"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집니다. 그 말이 가지는 한없는 무게보다 지금 당장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한 그녀는 자신의 감정 위주로 연애를 리드해 갑니다. [음악] 마냥 좋은 연인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지나치게 아름다웠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서울부터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온 상우를 기다리는 은수는 그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 뜨겁게 안깁니다. [음악] 세상이 내일 멈춘다 해도 사람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는 남녀, 여래는 그러나 시간을 견뎌 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진 불가피한 속성입니다.
사랑이란 광기의 속성이 있어 뜨거운 채로 오래 탈 순 없습니다. 사랑의 무게가 달랐던 그들은 절정을 지나자 곧 헤어짐을 맞습니다. 라면만 먹다 아버지가 담가 준 김치를 들고 와 같이 먹던 날, 상우는 아버지가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오라는 말을 툭 던집니다.
상우는 라면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화면에 잘 익힌 김치를 얹어서 먹고 싶어 하는 상우는, 윤 라면 같은 사랑만 하고 싶어하는 은수와는 다릅니다. 은수는 정색을 하며 "다 퍼 줘, 나 김치 뭐 딴 거"라고 말합니다.
그 외 적으로 은수는 "앞에 영락없이 상우는 내가 담가 줄 때"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상우는 아직 모릅니다. 사랑의 무덤이 결혼임을 경험하는 은수는 결혼을 꿈꾸는 상우가 부담스럽습니다.
현실은 로맨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셉니다. 상우의 마음을 아는지, 은수는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성향의 남자와 술을 마시고 늦게 돌아옵니다.
그녀의 괴로움은 이제 상우와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아 버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다음날 북엇국을 끓여 넣고 은수를 깨워 보지만, 은수는 버럭 화만 내고 먹지 않습니다. 은수는 북엇국과 김치로 상징되는 시간과 정성이 담긴 무거운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 이 우, 이어지는 흙에 돌연한 은" 남, 함에 상우는 "어쩜 이렇게 몰라" 합니다. 술만 먹으면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할 것만 같다, 술 마저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한 상우는 머리로는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맘대로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할머니가 평생 보여준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사랑의 전부로 알아온 상우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외치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내가 잘할게"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떠난 자의 마음입니다. 기어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은수를 보고 난 후, 새로 산 은수 차에 흠집을 내는 키질 하므로 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마는 상우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더 많이 사랑한 자가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며, 그 참혹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이로써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유기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봄날은 간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것이며, 그 봄이 지나야 또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은수를 우리는 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러하리라 봅니다. 쉽게 마음을 열어 쉽게 밀어내는 은수를 욕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은수 역시 예전에 누군가의 상우였을지 모릅니다.
그녀의 괴로움은 이제 상우와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아 버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다음날 북엇국을 끓여 넣고 은수를 깨워 보지만, 은수는 버럭 화만 내고 먹지 않습니다. 은수는 북엇국과 김치로 상징되는 시간과 정성이 담긴 무거운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 이 우, 이어지는 흙에 돌연한 은" 남, 함에 상우는 "어쩜 이렇게 몰라" 합니다. 술만 먹으면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할 것만 같다, 술 마저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한 상우는 머리로는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맘대로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할머니가 평생 보여준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사랑의 전부로 알아온 상우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외치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내가 잘할게"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떠난 자의 마음입니다. 기어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은수를 보고 난 후, 새로 산 은수 차에 흠집을 내는 키질하므로 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마는 상우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더 많이 사랑한 자가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며, 그 참혹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이로써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유기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봄날은 간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것이며, 그 봄이 지나야 또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은수를 우리는 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러하리라 봅니다. 쉽게 마음을 열어 쉽게 밀어내는 은수를 욕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은수 역시 예전에 누군가의 상우였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상우는 더 이상 은수 앞에서 지질했던 상우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면 나는 은수가 될 것이며, 상대의 마음이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잡고 싶다면 벽돌 없이 상우가 됩니다. 누가 다 못해서도, 혹은 강파악해서도 아니라 나조차 어쩌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은수와 상우 사이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권력자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치열하게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일 것입니다. [음악] 사랑의 시련 앞에 회복기를 끊을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할지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그 자신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열정만큼이나 타이밍이 관건입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땐, 제 아무리 멋진 연인이 다가와도 뿜어낼 수 없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온 소년 상우를 기억해 내고 그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지만, 이번엔 상우가 밀어냅니다. 당원은 늦게 받게 된 화분을 되돌려주며,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상우는 그 만남의 끝이 어떨지 알기에 그녀의 손길을 밀쳐 내지만, 어쩌면 그제야 장뇌의 투박하고 또 무거운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2. 영화의 의미와 해석
일상의 모습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며, 한 번쯤 꿈꾸는 사랑의 판타지를 과감히 배제하고 그 실제를 말하려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정서를 간지럽히는 로맨스가 아닌, 마치 주사 바늘을 꽂고 시간이 지나면 그 정서가 온몸에 퍼지도록 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있죠, "라면 먹을래요?" 실제로 둘의 사랑은 라면으로 시작하고, 둘은 식사 때 항상 라면을 먹습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라면에 비유되어 해석되곤 합니다. 지나고 돌아보면 상우와 은수의 관계도 라면과 닮은 구석이 있고요. 뜨겁게 시작하지만 금방 소진되고, 쉽게 만들어지지만 인스턴트로 남는 라면처럼 말이죠.
"빨리 와서 라면 끓여,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 조심해." 둘의 관계를 라면이랑 관점으로. 해석했을 때 저는 이 사랑이 시작하기 전 이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밥그릇에 가득 넘치는 밥은 확실히 라면과 짝을 이루는데요, 상우는 이 밥상을 먹성 좋게 받아들이고 은수는 부담되는 표정을 드러내며 당황스러워하는데, 이 밥상을 대하는 둘의 태도가 바로 각자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상우는 넘치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은수는 거기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죠. 혹시 사랑을 부인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사랑이 갑자기 너무 크게 느껴져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들의 다른 차이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수는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이고 상우는 결혼 경험이 없는 남자입니다. 은수는 강릉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고 상우는 서울에서 부모님, 고모할머니와 함께 살아갑니다. 또 상우는 장난기가 많지만, 은수는 연애 상대 외엔 만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이런 사소한 차이도 있고요. 이러한 그들의 차이 역시 단순한 설정에 그치지 않고 사랑에 투영되어 은수가 주도적입니다.
상우를 달래는 방법도 알고요. 상우가 찾아갈 때와 은수가 찾아갈 때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비교하자면 은수는 상우보다 좀 더 방법론에 능합니다.
랑 그 너머에 사실적인 부분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나 김치 못 담근 거 내가 담가 줄게." 상우는 점점 상대방에게 기울여 은수에게 맞추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은수는 자기 자신이 되려 합니다.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양쪽이 서로 똑같이 기울이지 않으면 중심이 무너지듯, 그들의 관계 역시 불안정하게 틈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쩌면 그 틈은 그들의 역할이 암시했던 거 같습니다. 함께 소리를 모으지만, 소리를 소비하는 사람은 PD 혼자인 것처럼, 함께 사랑을 하지만 결국 소비하는 것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그들의 관계는, 은수를 만나고, 또 상우에게 유일하게 종속되었던 자동차에서 벗어나 자신의 차를 마련함으로써 끝나려 합니다. 결정적으로 상우에게 또 하나의 사랑이었던 할머니가 죽고, 상우 또한 이제 확실해지는 날, 회사에서 서중 베이자 무심코 팔을 위로 들어 올리는 은수가 있는데요, 이건 다름 아닌 상우가 알려줬던 방법입니다. 그렇게 은수는 또다시 상우를 찾아갑니다. "할머니 갖다 드리라"며 화분을 건네는 은수, 상우는 이제 은수를 거절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상우가 우리의 일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철학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며 뜨겁게 추진하고 마음이 앞서지만, 그 권태에 매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게 사랑 자체 문제 있기보다, 사람이 고여 있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준을) 맞추다 보면 가짜 감정을 길어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는 자신의 감정은 어딘가 진실되지 못하기 마련이죠. 결국 사랑은 스스로가 근사해지는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를 멀리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기준에 휘둘리지 말고 사랑을 소비하는 대신 사랑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3. 총평
우리는 영화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각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투사하지 않고서는 볼 재간이 없습니다. 상우의 손을 거부한 이 영화는 상처받은 상우의 감정에 이입되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을 향해 간곡하게 기도드리는 당원의 모습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녀의 아픔을 보여주는 부분일 것입니다.
타자의 이질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은 최소한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사치입니다. 자신의 상황이 척박할 때에는 타인을 위해 마음 한자리 내어 주기 힘듭니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살아 내는 일은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집합이 갖는 병리적인 측면만큼이나 아이러니합니다. 모든 불멸의 사랑은 도달하지 못한 실패한 사랑이며, 또 그것만이 아름답게 각인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감정이 걷힐 때, 달려 견뎌 낸 사람은 그 고통의 시간만큼 성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달콤하기만 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봄날은 간다"가 상우의 성장 영화로 들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청춘 남녀의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새로운 사랑이 올까, 두려워하는 중년의 문턱에서 아파도 좋은 순정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회한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봄날은 가도, 원숙한 가을이 우리 생에 찾아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뜨겁지 않아도 편안한 그런 사랑 말입니다.